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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 지난 6일 창간 70주년 행사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 행사 가운데 하나로 명사 70인과의 동행 기획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저는 세월호의 아픈 기억이 있는 진도 팽목항과 겸재 정선의 눈으로 본 서울기행 그리고 이번에 떠난 유배 이후 다산의 춘천 여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의 여유당 여행을 사진으로 돌아 보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다산 정약용에 대해 약간의 이해가 필요 하겠죠.

그런데 역사 인물이라 상당히 긴 내용이네요.

그래서 마지막 사진 뒤로 보내겠습니다.

사진 모두 감상하시고 읽어 보길 권합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생가는 여유로운 가을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심경호 고려대 교수가 동행 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로 꼽히는 다산에게 한강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생가는 한강이 바로 보이는 마재(현재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살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척에 두고 있죠.

자신이 나고 자란 이곳에서 다산은 유배 후 18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다산은 한강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졌는데 ‘다산’이나 ‘여유당’이라는 당호보다 ‘열수(冽水·한강의 별칭)’란 호를 즐겨 썼다고 합니다.

동행에 참가한 참가자들보다 30여분 일찍 도착한 저는 생가 주변을 돌아 봤습니다.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은 힐링을 하기에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고요한 아침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힐링의 길을 저만 오롯이 느끼며 걸어 봤습니다.

이제 시작되는 가을 풍경도 느끼면서.....

그런데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원래 생가를 1986년에 복원한 것이며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것은 생가 뒤 작은 언덕에 자리 잡은 그의 묘뿐이라고 합니다.

참가자들과 함께 생가를 둘러본 뒤 다산의 묘에 올라 심경호 교수에게 다산에 대한 많은 설명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인과 합장된 묘 앞에는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 숙부인 풍산 홍씨지묘(文度公茶山丁若鏞先生 淑夫人豊山洪氏之墓)’라고 쓴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그 묘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생가의 전경도 소나무에 쌓여 보이는 풍경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히 옛것은 아니나 다산의 성품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더 멋진 곳으로 변해 있을듯 하더군요.

언제 한번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참, 서울서 하루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이곳은 임금의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지 바로 갈 수 있는 측근들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입구에 만들어 놓은 거중기입니다.

실학 박뭉관도 있습니다.

하지만 10시 오픈이라 돌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물속에 비친 아름다운 달을 볼 수 있는 수월정을 시작으로 힐링 타임이 시작됩니다.

다산의 일대기를 짧은 글로 요약해 두었네요.

1실부터 보는게 맞겠지만 저는 거꾸로 보겠습니다.

위키백과의 내용입니다.

유년시절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

1762년(영조38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글을 쓰다

일곱 살 때에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결혼

1776년에 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생전에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1629년~1690년)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성장과 공직 생활

아이들의 자람

1776년 결혼하던 해에 부친 정재원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났다.

대과 급제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돌아가신다.

성균관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이계심의 조세저항운동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3]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천주교 박해 연루

1800년 기독교(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4] 과 권상연이 기독교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5]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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